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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전제조건과 나없음의 수행(1)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시 : 2017-07-1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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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전제조건과 나없음의 수행(1)

     

지구의 기상이변과 국제사회의 갈등과 테러, 에너지와 전염병 문제, 이기적 경쟁과 물질문명과 정보사회의 위기상황에 대한 대안으로서 타락한 정신문명을 중흥해야 한다는 한 종교단체 지도자의 연설에서, 결론은 깨달음이 문제다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또 다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성과 발사체를 설계 제작해서 달까지 갈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논의되어야 달에 갈 수 있는 것이지, 저기 있다고 가리켜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류가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깨달음 자체가 정의되어 있지 않고, 그 곳에 도달하는 방법도 분명하지가 않다. 비유하자면 달에 가는 위성도 이제 겨우 유인위성을 시험 발사하는 수준이며, 더구나 그 달이 어떤 크기이고 어떤 궤도를 도는지, 지구와의 거리나 달의 중력과 대기환경까지도 파악이 안 된 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수련의 방법론은 차치하고라도 깨달음 자체가 정의되어 있지 않고 주관적 관점이 있을 뿐이어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들 가운데 행복이 가장 우선이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행복을 넘어 우리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리 많은 욕망이 충족된다 해도 여전히 남는 불만이 있다. 우리를 못살게 구는 목소리가 우리 안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인가? 우리의 이 물음들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 선각자나 지식 또는 종교가 주는 답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 위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아무것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단지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왜 우리의 실존에 대한 심오한 질문들을 신앙 위에서 다루어야 하는가?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는 없는가?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주관적 특성을 객관화한 연구가 1980년대에 죤 화이트에 의해서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는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선각자인 리차드 버크와 올더스 헉슬리에서, 크리스나무르티, 고피 크리슈나, 다프리 종, 켄 웰버까지 15인의 저서와 강연, 면담을 통해서 깨달음의 실체와 방법론을 집대성하여 깨달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를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선각자 15인의 전체 자료를 분석하여 깨달음이라는 공통분모를 추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도 결국 깨달음이란 이것이다그리고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없다. 다만 화이트도 인간 정신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경지와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주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 인간은 개체적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가는 과정이며, 깨달음이란 있음과 완전으로 가는 과정 사이의 완벽한 균형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의 통합과 모든 대립의 조화로운 혼합이며 끝없는 다양성의 귀일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현실세계에서 삼라만상이 하나로 통일된 삶이나 우주의식과의 합일, 에고인 개체의식의 초월로 나타나서 해방과 자유의 상태가 되는 특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자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진리의 정의나 깨달음의 설명에 불과하며 두뇌로 인식되어 지는 지식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달에 가고 진리가 되는 심신의 변화를 이루기 어려워서 또 하나의 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이트의 연구에서 그의 업적으로 인정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깨달음의 객관화를 시도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깨달음 자체는 아니지만, 15인의 자료 분석에서 한 가지 공통분모를 발견한 것이다. 그 것은 통일된 삶의 예비단계로서 자기의 완전한 포기 내지 자기무화(自己無化)가 필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왜 창조된 모든 것이 무화될 때까지 그 어떠한 영혼도 편히 쉴 수 없는가?”하는 명제에 답변이라고 율리아나((Julian)가 역설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통일된 삶이란 우주의 순리에 의해서 실체의 완전의식인 우주의식에 도달하여 합일된 인간의 영혼이 존재의 순환을 완성하고, 자신이 창조된 실존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근원회귀의 경지이기 때문에, 물방울이 개체의 틀을 가지고는 자신의 근원이 바다라는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바다로 돌아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자기라는 개체의식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의식과 합일 될 수 없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죤 화이트가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서 나없음(자기무화 self-naughting)이라는 공통분모를 도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없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객관성 있는 정의와 개념정리가 필요해진다. 오늘날의 인류는 전체의식으로 통일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두뇌에 의한 개체의식 중심으로 살아간다. 한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는 것과 같이, 우리 신체도 세포라는 분리된 개체가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한 개체를 형성하고 있다. 세포는 외부 환경에 대하여 각자 자신이 속한 장기 안에서의 역할과 완벽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독립된 체계와 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두뇌인 뇌세포는 세포의 집합체인 개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된 외부 상황에 대처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뇌세포는 외부 환경에 대하여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항상 유리한 상황을 유지해야 하는 생리적인 반응에 따라 최선의 결정을 하며, 이 판단 기준은 학습과 교육을 포함한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 경험은 감정과 결합된 기억과 동질성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여 우리가 생각과 마음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바로 이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로부터의 유무형의 자극에 따른 반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실체는 과거이면서 현재를 지배하게 되고, 항상 동일한 판단기준과 가치관에 의해서 일관성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것을 습관이나 학습이라고 부르며, 현재의 습관은 과거로부터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업(karma)이라고 부른다. 또한 현재가 변하지 않는 한 미래 역시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바로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지금처럼 길들여진 상식과 자신의 틀에 갇혀서 구속된 삶을 사는 상황이 계속되어서 달라질 수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과정이며 전제조건인 이 나없음의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기 과거의 집합인 경험과 기억, 습관의 틀로 감싸여 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이러한 인간적 틀을 깨어서 본성에 다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는 인간은 좋고 나쁜 습관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지적한 인도의 선각자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의 지적과도 일치하고 하고 있다.

따라서 나없음은 우리가 자기라고 믿고 있는 교육을 포함한 인간적 경험과 습관, 에고와 자기의식으로 이루어진 신념과 동일시, 아집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경지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깨달음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화이트는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버렸을 때 오는 것이라는 선각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현재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와 유전자에 기록된 업과 습이 부모 이전부터 누적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의 집합체이다. 사실 생명과 육체는 한 부모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니다. 우주 발생 이후 인간의 탄생은 단 한 번뿐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탄생은 생리적으로 세포의 재결합과 증식의 과정을 거쳐 자식이라는 피부로 재구성한 부모 세포의 집합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유구한 시간적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는 최초의 생명 탄생 이 후 현재까지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있는 엄청난 전지전능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인간적 자아를 형성하며 살아온 것이다. 따라서 이 자기의식에서 벗어나야만 인간 본래의 신성과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어서 나없음에 대한 필연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포와 인간 탄생의 실체는 오늘날 인류가 인간중심의 자기의식이 지배적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상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자기무화는 인간적 삶에서 형성된 이기적 자아를 초월한 상태이고 초자아로서, 나를 형성하는 모든 신념(관점, 관념, 개념. 의식, 분별, 판단) 자아의식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다. 몸이 있으나 몸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는 상태이고, 홍익이념이 발현되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자기무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고, 이러한 전제가 타당하고 진리라고 본다면, 현실 속에서 이러한 수련법이 전승 계승되거나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둘러보면 현대사회에서 많은 명상과 수련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나없음자기무화를 추구하는 수련법은 분명하지 않고, 일반적인 심신의 건강을 추구하는 명상이나 통찰, 자기완성 혹은 도통을 추구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나없음의 자기무화를 달성하는 수련법에 대해서는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고, 이기심과 자기의식을 벗어난 봉사로서 무아봉공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주된 수련법들에서 자기무화를 수련과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단지 자기무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내용면에서는 실재로 나없음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무화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과 수련문화의 기반이 자기무화가 핵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련법으로서 그 맥이 전승 계승되었을 것이며, 선각자들은 모두 이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수련법이 대부분 인간적 자기중심에서 각성이나 도통,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의 몸과 신념, 아상, 자기라는 에고를 깨어서 도달하려 하지 않고, 오물로 가득 찬 쓰레기통처럼 몸과 마음이 오염된 자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남과 다른 한 가지를 더 얻기 위한 욕심의 연장선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라는 길을 찾거나 스승과 신통을 찾아 헤매고, 정적인 명상과 수련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훌륭한 사상과 전통이 서구문명에 지배되어 단절되거나 왜곡된 것은 아닌지, 붓다와 예수, 공자와 노자, 환인과 환웅, 단군 등의 가르침에 온전히 도달하기 어렵도록 경전의 전달과 해석에 인간의 이기심이 작용하여 애초의 뜻이 왜곡, 변형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채 200여 년 전 동굴 속에서 발견된 점토판의 해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을 예로 보면, 성경도 위정자들에 의한 수많은 변형과 왜곡으로 점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당시 성인들과 선각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핵심과 정수가 온전하게 전승되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리 많은 선각자가 나타나지 않은 결과도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다시 생각해 보면 자기무화는 깨달음의 전제조건이 아니고, 이미 깨달음 자체이며 그 결과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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